국권 상실과 독립운동.


우리 나라는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정치의 부패로 백성들은 빈곤에 빠지고, 권력을 잡은 이들은 나라의 부강이나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도입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퇴하면서 조선은 강대국들의 침략 대상이 되고 말았다. 





국권 침탈.


19세기 중엽에 서양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를 강화아여 강대국으로 변신한 일본은, 청나라와 러시아를 무찌르고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국권을 빼앗음으로써, 대한 제국은 주권을 빼앗긴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맺어져,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나라와 외교를 펴나갈 권한을 빼앗겨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3.1 독립 운동.


나라를 빼앗긴 우리민족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 돌립을 되찾으려고 온갖노력을 다하던 가운데, 드디어 1919년 3월 1일에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기미 만세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이 운동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로써 세계 만방에 우리 민족에 대한 인식을 드높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 4월에 해외 각지로 망명했던 우리의 독립 지사들은 중국 상하이에 모여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한편 임시 정부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면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우리 민족 최초의민주 헌법을 제정하였다. 이 임시 정부의 헌법에서는 한국은 공화국이며, 정부는 의회제도를 취하고 종교, 양심,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한다고 하였다. 


 



카이로 선언.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이 멀지 않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 원수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전쟁 뒤의 처리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여기서 3개국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관심을 가져, 적당한 순서를 거친뒤, 한국을 자주 독립 시킬 결심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우리 나라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하였다. 

 

 





포츠담 선언.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 27일, 베를린 교외 서남쪽에 있는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한자리에 모여 회담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일본이 항복할 경우의 연합국측의 조건과 함께 카이로 선언에서의 우리 나라에 대한 약속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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